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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해후의 은(銀) - 5
라그나가 떨어진 곳은, 금속판으로 뒤덮인 바닥의 위가 아니라, 바위처럼 차가운 흙바닥의 위였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은 적었고, 금방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 큭 …… 정말 재수가 없구만. "
떠오른 기억들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자신의 인생이라는 녀석은 항상 위험천만한 일들의 연속 뿐으로 가득찼다고 생각됐다.
조금 툴툴거리면서 일어나다가, 허리의 검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라그나는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향하다가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그곳은 지금까지 내려온 구멍보다도 더욱 더 깊은 지하가 펼쳐진, 광대한 돔 같은 장소였다.
일대를 뒤덮고 있는 금속판은 여기저기 떨어져나가 있고, 그 안에 있는 차가운 흙덩이가 드러나 있었다.
라그나가 서있는 곳에는, 뭔가에 뒤틀린듯한 흔적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폭은 라그나가 양팔을 벌린 정도로는 어림 잡을 수 없다. 금속판과 흙을 도려내 만든 길 같은 것이, 이따금씩 큰 뱀이 기어오르듯 위쪽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이다. 예를 들면 ……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뱀이 쓸고 간듯한.
그리고 이 정도로 거대한 흔적은 남긴 것을, 라그나는 실제로 목격한 적은 없었다고 할 지라도, 짐작가는 게 하나 있었다.
게다가 또 한가지. 라그나의 시선을 빼았은 것이 있었다.
가마다.
지상을 향하여, 거대하기 짝이 없는 뱀이 지나간듯한 흔적이 남은 장소에, 거대한 구멍이 열려 있었다. 주위에 반쯤 열린 장치 같은 것의 중앙에 위치한 구멍은, 그 주둥아리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용암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중심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대지의 핵 같은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한 공간, 경계다.
" 이것은 ……. "
이상할 정도로 넓은 지하의 돔은, 마치 이 가마를 감싸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어떤 장치를 장착해놓았든 간에, 이 장소의 지배자는 가마다.
압도적인 열기는 천장까지 채워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림직한 한기가 새나왔다.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별개의 공기가 퍼져있다.
홀연히, 라그나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머리가 아프다. 종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있는 두통과 어지러움이 계속해서 몸의 밸런스를 뒤흔들었고, 라그나가 땅위로 무릎을 꿇도록 만들었다.
지면에 눌러앉은 천장판에 손을 뻗고, 몸을 지탱했다.
두통이 심해져 갔다. 머리가 찌그러질 것 같은 통증이라기 보다는, 머릿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 큭, 으 ……… 아, 크으 ……. "
참지 못하고, 손으로 머리를 세게 쥐어뜯었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이 꽉 조여오듯이 아파왔다. 빛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이 타버릴 것처럼 뜨겁다.
" 우, 아, 아아아아악 ………! "
고통에 울부짖는 목이 떨리고, 땀이 흐른다.
정보가, 영상이, 기록이, 감정이. 딱히 어디서부터도 아니고 단숨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모든 것이 전부. 방대한 질량으로 라그나의 두대골을 안에서부터 두들겨 부수려는 듯한 느낌이, 너무나도 강렬해 제상태로 있을 수가 없었다.
…… 그래도 폭풍이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져 버리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안에서부터 압박해오고 있던 정보의 파도가 멈췄다.
그리고 아픔도 괴로움도 멀어져간 후에는, 뭔가에 막혀진 것도 없이 완벽하게 기억이 돌아와있었다.
" 나는 …… 그럼, 그 때인가 …… 크윽. "
어째서 자신이 이런 먼 과거에 떨어져 있는가. 그 이유도 떠올랐다.
모든 것은 이 가마의 건너편 …… 경계에 의해서였다.
그렇다면 다시 경계로 떨어지면, 원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것을, 고통 때문에 흐트러져 있는 호흡을 고르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급격히 굳어버렸다.
얼음의 칼날로 잘려버릴 것 같은 예감이 라그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
라그나는 돌아볼 틈도 없이 몸을 날리며, 근처에 있는 잡동사니 사이로 들어가 숨었다.
어째서 숨었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격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명이다.
세리카는 아니다. 나인도 트리니티도, 혹은 미츠요시도 아니다.
훨씬 더 무겁고, 위압적이다.
이치와 부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짓밟아버릴 수 있는, 냉철한 소리.
무너져내린 천장과 어딘가에서 떨어져나간 기제의 뒤쪽에서, 라그나는 나타난 인물을 힐끗 훔쳐봤다. 병사를 보고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아주 자그마한 틈새에 눈을 대고 살펴보았다.
순간, 숨을 집어삼켰다.
가마가 감싸안은 용암의 열기가 피어오르며, 그 인물의 모습을 비추었다.
균형 잡힌 몸에, 탄탄한 근육을 가진 장신. 전신을 감싼 무채색의 갑주에는 여기저기에 새빨간 눈구슬 같은 것들이 박혀있었다.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그 가면.
표정도, 감정도, 의사조차도 덮어씌워버린 것처럼 …… 얼굴은 순백의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 가면 ………. "
무심코 목소리를 내자마자, 라그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가면 녀석 …… 우욱. )
기억에 있는 인물과 조우하는 것은 이걸로 4명째다. 하지만 그만큼은, 라그나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 6 영웅 중 한명, 하쿠멘만큼은.
다른 것은 그 기백. 압력조차 느껴지는 존재감은 절대적이었으며,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기를 짓눌렀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 극한까지 날을 세운 살의의 칼날 그 자체였다.
약 백년 후의 시대에서 라그나가 만난 하쿠멘이라고 하는 인물따위는, 눈앞에 있는 살의와 비교하자면 그저 잔영에 불과할 뿐이다.
잡동사니의 뒤에 숨어서, 라그나는 자신의 호흡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무릎이 흔들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키면 살해당한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따위가 아닌 확실한 사실이었고, 그 긴장감은 라그나의 몸에 깊게 파고들었다.
" ……… 이상하군. "
낮고, 탁한 목소리로 하쿠멘이 읊조렸다.
긴 은색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두세 발자국 정도 가마를 향하다가, 근처로 얼굴을 돌렸다.
" 확실히 이곳에, 검은 기운이 있었다 ………. "
미세하게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쿠멘이 칼에 손을 댄 것이다.
라그나가 몸을 숨기고 있는 연구시설의 잔해 너머로, 새하얀 얼굴이 근처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 검은 자여. 왜 그러는가. 하찮은 잔재라도 상관 없다, 나의 칼 앞에 모습을 보여라. "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육중한 참격처럼 들려왔다.
라그나는 신중하게 숨을 골랐다.
( 이것이 … 진정한 가면 녀석이라는건가 …… 큭. )
누군가에 대해서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갑자기 하쿠멘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까지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살의의 형체가 어떤 한점을 응시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확인하는 행동따윈 할 수 없다. 하지만 표정도 없는 새하얀 가면은 조용히, 라그나가 몸을 숨키고 있는 잡동사니 속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 큰 발이 내딛어졌다.
라그나의 몸이 움찔하고 굳어버렸다.
칼을 빼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이할 정도로 긴 은색의 칼날에, 가마에서 뿜어져나온 작열의 섬광이 비춰졌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그 칼날은 더욱더 선명한 적색으로 물들 것이다. 라그나의 피로 칠해져서.
죽음, 이라고 하는 매우 간단한 단어가 라그나의 뇌리에 각인됐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늘어뜨린 채, 왼손으로 강하게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 뭣 ……!? "
높은 천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새되게 울려퍼졌다.
하쿠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어서,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발소리가 몇개 들려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하의 공동까지 내려와선, 가마의 앞에 멈춰 서있는 하쿠멘을 보면서, 경계심을 짙게 세웠다.
" …… 당신, 누구야? "
맨앞에 서있는 것은 나인이다. 하쿠멘을 모습을 확인하고서, 세리카와 트리니티를 등뒤로 감싸듯이 몸을 당겼다.
" ………… 마도사인가. "
공기가 일그러진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 시설의 생존자는 아닌 것 같은데 …… 애초에 인간이야? "
묻고 있는건가, 말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는건가, 나인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하쿠멘의 새하얀 얼굴은 무얼 보고 있는걸까, 가만히 기운을 살피고 있는듯 그저 앞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허튼 짓을 한다면 긴박하게 팽창하고 있는 긴박감의 실은 끊기고, 대신에 격렬한 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그것은 나인도 …… 그리고 하쿠멘도,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 검은 기운이 사라졌군. "
조용히 하쿠멘이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등의 칼집에 거두었다.
그런데도 나인은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정체를 모르는 백면(白面)의 사내. 마치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와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과연. 네가 그런건가. "
딱히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고 울려진 말은 무겁게 가라앉듯이 사라져갔다.
" 지금이 해후의 때라고 한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 나의 칼날은 검은 자를 멸하기 위한 것. 너희들처럼 취약한 인간을 베기 위한 것이 아니다. "
" 당신 …… 뭘 알고 있는 거야? "
물으면서도, 나인은 몸을 움찔했다. 가면에 눈동자 같은 건 없고, 어딘가에서 엿봐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 바로 코앞에서 응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극히 예리한, 칼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짐짓 다가선다면 망설임 없이 베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얼굴 없는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 ……… 언젠가. "
그리고 순식간에 지면을 박차올랐다.
" 읏, 기다려 줘! "
눈초리를 올리면서 나인이 외쳤다. 하지만 다시 쳐다봤을 때, 그 백은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녀들이 내려온 벽에 나있는 긴 계단은,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등골을 얼려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잔향처럼 떠다닐 뿐이었다.
" 지금은 ………. "
백은의 모습을 찾고 있는 나인의 옆에서, 트리니티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본 적도 없는 기묘한 인물. 그 그림자에서, 트리니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실을 느꼈다.
" 나인, 이것은 예감일 뿐이지만요오. "
" 뭔데. 확실히 말해줘. "
" 저희들, 또 저 사람과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분명 멀지 않은 미래에. "
이치를 벗어난 무언가가 트리니티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돌기 시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예감은 약간이나마 나인의 가슴에도 남아있었다.
하쿠멘이 떠난 덕분에, 지하 공동의 공기가다시 온도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 우, 라그나! "
동시에 세리카는 잡동사니 뒤에 앉아있던 라그나를 눈치 채고, 서둘러 뛰어왔다.
" 다행이다 …… 괜찮아? 상처는? "
" 없어 ……. "
세리카의 손이 어 꺠를 더듬는다. 그 감촉과 체온에, 라그나는 큰 안도감을 느꼈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칼에 베여 죽을 것이라고.
아니, 나인 일행이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 라그나? "
" 아아, 괜찮아. 떨어졌을 때 여기저기 긁힌 정도야. "
걱정스러운듯이 물어오는 세리카에게, 라그나는 애써 미소를 돌려줬다. 나름대로 간신히 만들어낸 웃음이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공포심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목소리가 신경에 쓰인 모양이다.
" 아퍼? "
" 아, 아니, 멀쩡해. "
고개를 저으며, 라그나는 방패로 쓰고 있던 천장판에 매달려 일어섰다. 실제로는 아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감각도 어딘가로 날려버려진 것 같아 모르겠다.
다행히도 다리는 그 백은의 공포에서 벗어난듯, 떨지 않고 제대로 몸을 지탱해주었다.
" 저 높이에서 떨어져놓고, 용케 멀쩡하네. "
또각하고 딱딱한, 나인의 하이힐이 바닥을 두드렸다.
" 그런데 …… 당신. 저 묘한 남자를 알고 있어? "
알고 있으니까 숨어 있었겠지. 그렇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라그나는 천장판에서 손을 놓고는, 그 손으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 아아. 그렇다곤 해도, 잘 알지는 못해. "
" 뭐하는 사람이야? "
" 글쎄다. 내가 알고 싶을 정도야. "
" 그럼, 이름은? "
" ……… 하쿠멘, 이다. "
그것이 녀석이 밝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 이상, 라그나는 그 백은의 사내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왔으며 뭘 하려는 건가. 인간이긴 한 걸까.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게 된다면 ………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 역자 노트
하쿠멘이 등장한 편입니다.
네에, 아쉽게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요.
나인도 쫄아버릴만큼 굉장한 포스를 자랑하고 바로 떠나갔습니다.
이유는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
그나저나 라그나, 의외로 하쿠멘을 몰라서 [......] 가면 변태 가면 변태하는 줄 알았는데,
이미 6 영웅 중 한명이라는 걸 알고 -_- 있었군요.
마지막의 '알게 된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를 보자면 ……
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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